기독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은 "영(spirit)"과 관련되어 나타난 말임을 부인할 수 없다. "영"의 형용사형인 "영적인"(spiritual)이라는 말에서 "영성"(spirituality)이라는 용어가 발생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웹스터 사전은 "영"(spirit)을 "몸과 구별되는 인간의 지적 혹은 비물질적인 부분"(the intelligent or immaterial part of man as distinguished from the body)으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웹스터 사전은 현대인의 영이해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것은 영이 반드시 종교적이며, 초월적인 존재만을 의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영(spirit)은 인간의 지적활동을 포괄한다는 일반적인 이해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웹스터 사전은 "영적인"(spiritual)이라는 단어를 설명할 때 역시, 그 단어가 종교적인 사건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일과도 관련이 되어 사용된다고 함으로써 "영"의 사용용도가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영성"(spirituality) 역시 교회나 종교인(제사장 포함)에 관련되어 사용되기도 하지만 인간영혼의 삶과 관련된 모든 관심에 적용된다.

구약성서 역시 "영"과 관련된 용어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히브리어 루아흐는 대개 "바람, 호흡, 공기, 영" 등으로 번역된다. 이 단어가 하나님(神)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 "하나님의 영," 혹은 "신적인 영"으로 이해된다. "루아흐"는 구약성서에서 대략 378번 출현한다. 그 용도는 첫째로 공기 혹은 바람과 관련하여 물질적인(physically) 의미로 131번 출현한다. 두번째로 그 단어는 인간이나 동물의 호흡과 관련하여 생물학적으로(physiologically) 39번 출현한다. 세번째로 인간의 내적인 삶을 표출하는 숨소리나 감정 따위를 표현하는(psychically) 용도로 74번 출현한다. 이 경우 "루아흐"는 "혼" 혹은 "생명"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네페쉬"와 "가슴"을 의미하는 "렙"이라는 단어와 평행구로 등장하기도 한다. 여기서 히브리어 "네페쉬"(영혼, 생명)은 몸을 의미하는 "바싸르"와 영을 의미하는 "루아흐"가 결합된 의미를 지닌다. 그 다음으로 가장 많이 출현하는 용도로 "루아흐"는 초월적인 존재(神)와의 관련성 안에서 134번 나타난다.

초월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의 "루아흐"는 주로 하나님(神)과 관련되어 나타나며, 이 경우 그 단어는 "자연을 포함한 인간영역 밖의 모든 사물"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것은 자연과 초자연을 구별하지 않고 단순히 인간적인 요소와 비인간적인 요소를 구별하는 히브리인의 사상에서 연유한다(Hoyle, 785). 따라서 "이상한 영"(extraneous spirit) 혹은 "사악한 영"(evil spirit)에 관련될 때도 이 단어는 사용된다(삼상 16:16; 18:10; 삿 9:23). 그러나 히브리어 "루아흐"는 우리가 그 동안 논의했던 종교인의 "영성"을 충분하게 설명해주지 못한다. 단지 구약성서에 나타난 "영"의 개념과 관련지어 생각할 때, 구약의 영성은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이라는 다소 초월적이며 애매한 한계성을 지닌다. 여기서의 초월성은 인간적인 요소 너머에 있는 모든 것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경우에 "루아흐"는 인간의 내적인 심리상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 단어는 인간의 슬픔, 분냄, 고통 등의 의미와 관련되어 사용된다. 이 단어는 후기에 지식체계(organ of knowledge) 로 간주되기도 했으며(겔 11:5; 20:32; 대상 28:12; 시 77:6), 인간의 의지(willing spirit)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시 51:12, 14[히]; 출 35:21; 참조. 겔 11:19; 시 32:2; 51:17; 사 57:15; 잠 16:18이하). 또한 "루아흐"는 비물질적인 차원에서의 인간의 내적 의식(consciousness)과 관련하여 사용된다(사 26:9; 잠 16:32; 단 5:20; 시 32:2). 그러나 히브리어 "루아흐"에서 인간의 경건한 종교행위나 신비적 금욕주의와 같은 기독교전통에서의 영성개념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주목할 만한 성서구절이 발견된다. 호세아 9:7은 예언자를 "영의 사람"(the man of the spirit)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중재자로서의 예언자는 (신)의 영에 감화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예언자는 이 세상의 기준과 지식의 범주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의 세계 곧 초월적인 신적인 세계로부터 인정받은 "하나님의 사람"임을 암시한다. 이 점에서 볼 때 구약성서의 영성은 "초월적인(영적인) 영역에서 활동하는 인간의 종교적 심성" 혹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예언자적인 성품"으로 잠정적인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구약의 "영성"은 초월적 세계와 현실적 세계의 교량적 역할을 하는 예언자적인 종교성이 될 것이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영성(spirituality)은 일반적으로 "영"(spirit) 으로 번역되는 프뉴마의 용례에서 살펴볼 수 있다. 퓌스케(생명 혹은 영혼)은 "프뉴마"(영)와 "사륵스"(몸)의 결합에 의해 존재한다. 그러나 프뉴마는 대체로 영적존재(spirit)를 의미하며 성령(Holy Spirit)이나 악령(evil ghost) 모두를 포함한다. 프뉴마는 비물질적이며 심리적인 상태를 나타내며, 가끔 내적인 존재(예를 들면 내적 중심)를 지시한다(막 2:8; 행 17:16; 롬 1:4; 고전 2:11; 5:5; 골 2:5). 동시에 프뉴마(영)는 인간의 강한 욕망을 표현하며(행 18:25), 때로는 내적인 결단을 보여주기도 한다(눅 21:14; 행 5:4). 그러나 이러한 용례는 프뉴마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영성"(spirituality)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못한다.

오히려 고린도전서 2:15의 "프뉴마티코스"(one who is spiritual)가 기독교전통에서의 영성을 비교적 잘 설명해주고 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니라"(고전 2:14-15). 여기서 영적인 사람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초월적 영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일(성령의 사역)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이점에서 볼 때, 중세의 영성운동이 바울사도의 신비체험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는 기독교 초기의 영성운동은 플라톤철학과 초월적 신비주의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프뉴마가 삶속에서의 종교적 열정과 관련되어 사용된 흔적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열심으로(spiritually) 주를 섬기는 일(롬 12:11)과, "성령의 일이 곧 신령한 것"이라는 점(고전 2:13), 그리고 "신령한 자들은 어떤 시험도 이길 수 있다"(갈 6:1)는 내용은 모두 프뉴마가 열정적인 신앙생활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고전 14:1). 엡 1:3은 "신령한 복이 하늘에 속한 것"으로 소개함으로써 "프뉴마"의 속성은 지상의 것이 아닌 초월적 세계에 속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엡 5:19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주님을 찬양할 것을 외치면서, "프뉴마"는 초월적인 존재(여기서는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의 영적인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성서의 "루아흐"나 신약성서의 "프뉴마" 모두 초월적인 속성을 전제로하면서, 동시에 세상에서의 종교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용어는 인간의 종교활동(예배 등)이나 신과 인간 사이의 교통(communication)에 관련되어 등장할 뿐, 현실적인 사회참여나 삶 속에서의 적극적인 종교활동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런 이유로해서 초대교회와 중세교회에서의 기독교 영성운동이 개인적인 신비체험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것은 그 동안 기독교 공동체에서 성령운동과 관련하여 개인의 구원체험이 곧 영성운동의 일환으로 간주된 결과를 초래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